"가난 속에서도 집에 사람이 와고, 나눠야 복 받는다."는 어머니의 교훈

▲ 남구 독립로 프라자 호텔 옆에 위치한 <삼천포 국밥24시>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 신문식 기자회원 ] 
요즘 세상에 작은 이해관계로 갈등. 배신. 살인 등, 무서운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사건사고가 신문이나 TV를 통해서 눈과 귀를 어지럽게 한다. 그러나 불우이웃을 위해서 헌신 봉사활동 하는 분들이나 기증. 기부하는 분들이 더 많기에 세상은 아름답고 따뜻하고 살맛나는 세상이 되기도 한다.

광주광역시 남구 백운동 독립로 프라자호텔 옆 <삼천포 국밥24시(조정희 사장)>는 백운동에서 기부천사로 소문이 널리 알려있어 22일 15시 30분 손님이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서 찾아가기로 약속하고 방문했다.

백운동에서 기부천사로 알려졌는데 어떻게 해서 쌀 기부를 하게 되었습니까? 물었다. 조정희 사장은 “나는 어려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편모슬하에서 광주공원에서 어머니가 리어카에 국밥장사를 했을 때부터 국밥장사 일을 배웠습니다. 그때는 어려웠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요. 그 어려웠던 시절에 리어카에서 장사하시면서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냥 밥을 주는 것이 화가 났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 사는 집에는 사람이 와야 복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지금까지 그 어머니 말씀을 잊지 않았으며, 근처에 <우리 국밥> 집을 하는 아는 언니가 있었는데 틈을 내서 갔었다. 그때 마치 스님이 와서 시주해 가는 것을 보고 ‘뭣 하려 시주를 해주냐? 놀고먹는 사람들을?’이라고 말했더니, <우리 국밥> 언니는 ‘우리는 찾아오시는 손님 덕으로 살고, 스님은 돌아다니며 먹고 산다.’고 해서 크게 깨닫고 지금까지 그 두 분의 말을 잊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 조정희 <삼천포 국밥24시> 사장이 활짝 웃고 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기부를 하셨는지요? 물었더니, 조정희 사장은 “기부는 무슨 기부랄 것이 있습니까? 우리 식당에 쌀을 들일 때마다 20kg 한 포대를 동사무소 뒤주에 채웠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동사무소에는 무슨 뒤주가 있었습니까? 물었더니, 조정희 사장은 “그 당시 광주 어떤 신문에 백운동사무소에 <불우이웃돕기 뒤주>가 있다는 기사를 보고, 그 뒤주를 내가 조금이라도 채워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포대씩 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그럼 기부한 지는 몇 년이나 됩니까? 했더니, “한 6년이나 됩니다만 부끄럽다.”라고 말하며, 많이 못 한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럼 식당영업을 직접 경영하시면서 어려운 일은 없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조정희 사장은 피치 못한 사연이 있었는지 눈시울을 붉히면서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잃었습니다. 그 자식도 보육원에서 입양해서 잘 성장해서 우리 부부한테 참 효자였는데 작년에 중국에서 죽었습니다. 간장이 끊어진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처음 느껴봤습니다. 기가 막힌다는 말도 처음 스스로 느꼈습니다. 키운 자식이 이처럼 애간장이 녹는 것 같은데, 낳아서 키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얼마나 애환이 클까요?”라고 말하며,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렸다.

<삼천포국밥24시>가 원래는 50m 아래에 있었는데, 그때는 손님들이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국밥집이 호황이었는데, <삼천포국밥24시> 국밥집이 특별히 손님이 많은 이유는 무엇이며, 지금 현재의 가게로 이사를 오게 된 동기는요? 하고 물었더니, “그 두 이야기 중에서 하나만 이야기를 하다. 손님이 많았던 것은 백운동에서 21년 국밥집을 했으며 음식을 내가 직접 정성과 어머니한테 어려서부터 배운 손맛일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고 말했다.

▲ 아버지께서 화순탄광 노조위원장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받은 표창장과 수상잠면의 사진을 보이고 있다.
장사가 잘 되었던 가게를 이사하게 된 것은요? 하고 물었더니, 조정희 사장은 이사얘기를 생각하면 사지가 떨립니다. 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조정희 사장의 표정으로 봐서 인간적 배신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애증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지 조정희 사장은 “국밥집을 친정어머니한테 배웠는데 친정어머니께서 건강하게 살아 계신다.”라고 말하면서, “친정어머니께서 지금도 오시면 이렇게 손질을 해주신다.”라고 고기내장을 손질하는 사진을 내놓았다. 친정어머님의 연세는요? 하고 물었더니, 95세라고 말하면서 “아버지께서 39세에 화순탄광 굴이 무너져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친정어머니는 39세에 홀로 되어서 6남매를 국밥장사를 해서 키웠다. 그래도 자식들이 모두 잘 되었다. 나만 이렇게 산다.”라고 말했다.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고생을 많이 했겠군요? 물었더니, “고생이야 그 시절 안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마는 우리 아버지는 참 훌륭했습니다.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군인이었으며, 제대 후에는 함평 경찰서에 근무했으며 축구부에서 활동을 했습니다.”라고 말하고, 함평경찰서 시절 <축구우승 기념사진>을 내놓았다.

조 정희 사장은 “훌륭하신 우리 아버지는 소도둑을 잡았는데, 도둑한테서 도둑 어머니의 병환에 대한 슬픈 사연을 듣고 봉급을 털어서 소 주인에게 소 값을 마련해주었으며, 소도둑을 방면해준 공직자로의 책임감 때문에 경찰직을 사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조 정희 사장의 심경으로 보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픈 사연 때문인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젊은 39세로 탄광토굴이 무너져 별세한 아버지를 떠오른 것이었다.

조 정희 사장은 한참 후에 “아버지는 <화순탄광 제1대 노조위원장>이었으며, 당시 <이승만 대통령께서 표창장 수상 사진과 표창장>을 내놓았다.

<삼천포국밥24시>는 부모님의 투철한 <사랑과 봉사정신)그리고 이웃 언니의 나눔의 교훈을 잊지 않고 살아오면서 국밥장사로 큰돈은 못 벌지만 <나눔이란 기부정신은 곧 나에게 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오늘도 열심히 뜨거운 가스 불꽃 옆에서 오시는 손님을 위해서 정성어린 손맛을 일구도 있었다.
▲ 먹음직 스러운 새끼보 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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