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 핵개발 일지

[한국시민기자협회 뉴스포털1 김대호기자]1947년 1월 25일 소련 소비에트 정권과 북조선 인민위원회 사이에 무기인도에 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협약에 따라 소련은 소총, 기관단총(따발총으로도 불림), 경기관총, 중기관총, 박격포 등을 북한에 판매하고, 북한은 그 대가로 2만 5천 톤의 우라늄을 소련에 제공하기로 했다.

1947년 3월 북한은 전국에 소련 유학생들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다. 김일성은 소련의 선진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핵개발 및 무기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술인재 육성을 위해 유학생 모집을 시작한 것이다.

전국에서 온 유학 지망생들은 평양시 대성구역 룡남동에 있는 김일성종합대학 맞은편에 설치한 유학생 강습소에서 외국어 수학 등의 시험을 치렀다. 시험에서 합격한 지망생들은 6개월간의 강습을 받고 소련으로 유학갈 수 있었다.

북한의 핵개발을 주도한 서상국, 최학근, 박관오들은 이곳을 거쳐 소련 유학을 다녀왔고 월북 과학자들인 한인석, 정근 등도 그랬다.

그 시기 서울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로 재직하던 도상록 박사가 월북하였다. 일본 도쿄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도상록 박사는 ‘헬륨수소 분자의 양자역학 취급’ ‘수소 가스의 양자역학적 이론’란 논문들을 써서 미국 학술지에 발표한 유능한 학자이다. 훗날 북한 핵과학 아버지가 된 그가 월북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해방 후 도상록 박사는 서울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양자물리학계의 권위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국대안 파동(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시위) 때 그는 교수회에서 결정하여 학생 데모비용으로 쓴 돈에 대해 책임지라는 압력을 받았다.

정부와 결탁한 학무부에서는 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결국 그는 공금횡령이라는 누명을 쓰고 파면을 당했고 경성대학을 비롯한 사회 각 방면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경성대학 교수들이 들고 일어나 학무부에 전말을 상세히 해명하며 도상록 교수에 대한 파면을 재고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학무부에서는 교수들의 해명과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돌연 경기도 경찰부에서 도상록 교수를 체포 구금시켰다. (자유신문 1946년 6월 7일자 기사)

그날 경성대학 교수단에서 아래의 내용으로 성명을 발표하였다.

‘도 교수의 혐의란 교수회에서 선출된 반탁투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학생 데모에 경비를 지급한 일이다. 하지만 이태규 이공학부장은 부장에게 보고 없이 임의로 유용한 것이라 주장했고, 도상록 교수는 부장에게 보고한 후에 지급했다고 주장하였다.

6월 19일, 경성대학 탁치문제 위원회 선전부에서 다음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금번 도 교수파면 이유로 도 교수가 이태규 부장에게 사전 승인 없이 시민대회 참가비용을 사용하였다 하나 이것은 이태규 부장 개인의 주장이고 도 교수는 사전에 승인을 얻었다고 말한다. 설사 사전 승인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1월 11일 이공학부 교수회에서 동 금액은 교수회에 이 부장에게서 일시 차용한 것으로 하자는 이 부장 의견대로 정식으로 결정된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필 도 교수 일 인에게 처단이 내린 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더구나 일전에 도 교수는 찰에 구금까지 되었다가 석방되었으니만치 우리는 조선의 이공학 재건을 위하여, 도 교수의 파면취소를 당로자에게 청원하는 동시에 금번 사건에 관한 항간의 불순한 유언이 시정되기를 기다린다.’

(자유신문, 1946년 6월 20일자)

그렇게 도상록 박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을 때 김일성은 그에게 프러포즈를 하며 평양으로 불렀다. 그리고 도상록교수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말했다.

“이 나라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박사님의 나라로 만들어 보시오.”

남한에서는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도둑으로 몰았는데 김일성은 나라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말로서만 아니라 실제로 그를 극진히 대해주었다. 북한의 국기인 인공기를 제작할 때도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장으로 있던 그를 불러 자문을 구했다.

그 후 도상록 박사는 북한의 핵-과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1947년 4월 소련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은 전문가들을 북한에 파견하여, 북한과 공동으로 우라늄 매장량을 조사하고 우라늄광산을 개발했다. 따라서 채광된 우라늄 광석은 고스란히 소련으로 운반되어 핵개발을 가속화 시켰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에 우라늄 광석을 열심히 퍼 날랐다. 소련이 하루속히 핵무장에 성공해야 미국의 원자탄에 대한 핵 억제력을 갖고 안정적으로 남침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 김일성에게는 무력통일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북한에서 채광되어 소련으로 운반된 우라늄 광석은 9천 톤에 이른다. 소련은 그 우라늄 광석으로 핵개발을 다그쳐 핵실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1948년 9월 북한은 평양공학대학(현 김책공업대학)을 설립하고 핵공학 기술, 정밀기계학, 핵 전자공학 학부들을 설치하였다.

1949년 8월 29일 23시 57분 소련은 카자흐스탄의 사막에서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는 미국이 나가사키에 투하한 플루토늄 핵폭탄과 흡사한 것으로, 소련이 1950년대 중반쯤에 가서야 핵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미국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이었다.

미 중앙정보국(CIA)는 정보 분석 보고서를 통해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 시기를 1953년 중반기라고 분석했던 것이다.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하며 미국의 핵무기 독점시대는 끝났다. 결국 북한에 매장된 우라늄이 미국의 핵무기 독점시대를 끝내는데 일조를 한 것이다.

1950년 3월 북한은 소련 정부로부터 받은 군수물자에 대한 대가로 우라늄 원광 15,000톤, 금 9톤, 은 40톤을 제공하였다.

1950년 4월 스탈린은 김일성을 모스크바에 불러 비밀 회담을 갖고 그의 남침계획을 승인하였다. 미국의 원자폭탄에 대한 핵 억제력을 가진 결과였다. 그해 5월 13일 김일성은 베이징을 방문하여 모택동을 만나 그 사실을 알리고 남침계획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렇게 김일성의 남침계획은 소련의 핵 억제력을 업고 이루어졌다.

1949년 10월 중국 심양에서 김일성과 모택동은 비밀 회담을 가진후, 그해 12월부터 1950년 1월 말까지 중국 국내전쟁에 참전하였던 조선인부대 10여만 명을 극비리에 북조선으로 이송하고, 그들로 조선인민군 제4사단, 제5사단, 제6사단, 제12사단 등의 최정예 부대를 조직하여 남침 준비를 완료하였다.

1950년 3월 18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지시한 분량의 납(우라늄)을 소련으로 보내겠다는 귀하의 지원에 감사합니다.

소련정부는 무기탄약과 기술설비 지원에 대한 귀하의 요청을 전적으로 수락합니다.’

‘납’은 우라늄의 위장된 명칭인바, 이것은 러시아 옐친 정권이 구소련 극비문건 속에서 발견한 것을 공개한 것이다.

만소로프 전 북한 주재 소련대사의 논문 「북한 핵폭탄으로의 길」을 보면 ‘소련은 북한의 우라늄을 사용하여 1949년 8월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하고 미국에 대항하는 핵 대국의 위치를 확보했다. 김일성은 그 대가로 받은 무기로 1950년 6월에 38선을 넘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증언했다.

당시 소련의 외교 전문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스탈린 동지는 김일성에게 국제 환경이 한반도 통일에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변했다는 점을 확인해주었다. (중략) 중국은 소련과 동맹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 공산주의에 도전하는 것을 더욱 주저하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 오는 정보는 이러한 전망을 뒷받침해준다. 승리의 분위기는 간섭받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소련이 원자폭탄을 갖고 있고, 우리의 입장이 평양과 더욱 밀접해지고 있는 사실로 인해 더욱 고조되고 있다.’

1950년 6월 초,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인민군 정찰부장 리학문을 서울에 파견하여 서울대 공과대학장 이승기 박사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핵개발을 위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승기 박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북한에서 친일파들을 완전히 청산했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유학한 자신도 북에 가면 그 청산대상이 될 것 같아서였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리학문이 이승기박사의 신변을 확보하고 계속 설득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김일성은 산업성 부상 이종옥을 파견하였다. 그는 6·25 때 조선실록을 북한에 가져간 장본인으로서 훗날 부주석까지 지내며 김일성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다.

이승기 박사는 그에게 설득되어 1950년 7월 30일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갔다.

1950년 11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북한에 원자폭탄 사용을 언급하였다.

1950년 12월 9일 맥아더는 원자폭탄 사용을 위한 사령관 결정권을 요청하였다.

1950년 12월 24일 맥아더는 향후 60년 동안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한 34개의 원자폭탄 벨트 제작을 건의하는 목록을 작성하여 국방부에 보냈다.

1951년 2월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육군이 곧 이용 가능한 핵폭탄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전략핵무기는 한반도에 대량 배치되었다.

1952년 4월 22일 미국은 네바다 주 사막에서 공개 핵실험을 하였다.

1952년 여름 미국은 원자탄을 발사할 수 있는 로켓(전술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였다.

1952년 10월 북한은 조선과학원을 설립하고, 그해 12월에 조선과학원 산하에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김일성은 전쟁 중에도 내각 교육성에 지시하여 전선에 나가 있는 인재들을 불러들여 소련으로 유학을 보내 핵개발 인재들을 키우기도 했다.

1953년 2월 11일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북한 개성지방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1953년 5월 13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브래들리(Bradley)와 헐(Hull) 장군은 한반도의 종전을 위한 원자폭탄 사용을 제안함에 따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원자폭탄이 기존의 무기들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다행히도 이 땅에서 핵폭탄이 터지지 않고 전쟁이 멈춘 것이다.

1955년 4월 조선과학원은 원자 및 핵물리학연구소 설립을 결정하였다.

1955년 6월 조선과학원대표단은 동유럽 과학 회의에 참석하여 핵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

1956년 2월 북한은 소련 듀브나에 위치한 합동 핵연구소 설립 협정과 헌장에 사인하였다.

1956년 9월 3일 미국은 남한에 전술핵무기 기지를 설치한다고 공표하였다. 북한이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극도의 불안을 느낀 김일성은 소련에 도움을 청했다. 그 후 조-소 공동 핵개발 협정을 맺고 소련의 최대 핵개발 연구기관인 듀브나 연구소에 수십 명의 연구진을 파견하였다. 그 시기는 미-소 냉전체제로 국제 패권을 두고 두 나라가 다투던 시기였으므로 소련은 동맹국들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북한은 해마다 수십 명씩 소련 듀브나 연구소에 파견하여 핵개발을 위한 기술 인력을 갖추었다.

1957년 6월 21일 미군은 남한에 전술핵무기를 들여오기 시작하였다. 최신형 제트기들도 이 땅에 들어와 실전 배치되었다.

1958년 1월 28일 미군은 280미리 핵탄두포와 지대지 미사일 어네스트 존을 남한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을 핵전쟁에 대비한 팬토믹(Pentomic) 사단으로 개편하였다. 팬토믹 사단은 핵전쟁을 대비하여 18개의 핵무기 체제를 갖추었는데, 155미리 곡사포 12문, 8인치 곡사포 4문, 어네스트 존 미사일 발사장치 2기로 구성된 전술 핵 사단이었다.

1959년 1월 29일 유엔군사령부는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를 공개하였다. 미국이 원래 동북아 핵전략의 발판으로 자리 잡은 곳은 일본이었다. 일본에 핵무기를 저장해 두었다가 유사시 동북아에 핵우산을 제공한다는 전략이었는데, 이는 1951년에 체결된 미―일 안보조약에 의거하여 일본정부의 허락 없이도 미국 독단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 미국의 동북아 핵전략은 1950년대 후반부터 일본 내에 벌어진 전 국민적‘반핵운동’이라는 암초에 부딪치게 되었다. 한편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핵무기 수용을 간절히 원했다.

1957년 한국 정부의 열렬한 환영 속에 일본 내 9개의 미군기지에 분산 배치되어 있던 핵무기들이 한반도로 넘어왔다. 남한의 핵 기지와 제7함대가 보유한 핵무기 정도라면 동북아시아에 핵우산을 제공할 수 있을 거라는 미국의 전략적 계산에 의해서였다. 그에 김일성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하자며 끊임없이 이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남한정부와 미국은 북한의 주장에 코웃음 치며 들으려하지 않았다. 북한이 남침하면 즉각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의지에서였다.

1959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이 원자탄을 만들어야 북한을 토벌하고 통일할 수 있다며 서울대에 핵공학과를 신설하였다.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한 후 서울대 핵공학과는 원자력과로 바뀌었음.)

1959년 미군은 한국에 마타도어(Martardor)크루즈 미사일 1개 중대를 배치하였다. 마타도어의 사정거리는 1,100킬로미터로서 북한을 넘어 중국과 소련을 겨냥한 것이었다. 한반도가 미국의 군사전략에 의해 핵무기 전초기지가 된 것이다.

1959년 9월 북한과 소련은 ‘조―소 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협정’을 체결하고 소련과 공식적인 원자력 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1959년9월 북한은 중국과도 원자력 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북한은 전후 복구건설이 완료된 1960년을 완충기해라고 하는데, 그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영변 핵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이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소련 듀브나 핵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최학근을 불러들여 영변 핵연구소 소장으로 임명하였다.

최학근은 김일성의 가문과 악연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김일성에게 독립운동 동지이기도 했던 김형권이라는 삼촌이 있었다.

그는 1931년 풍산군 파발리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순사부장 미쯔야마를 사살하고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그는 형님인 김형직과 친분이 있고, 독립군 총관을 지낸 최진팔이란 사람의 집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그가 일본 경찰에 고발하여 김형권은 체포되었고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최학근은 바로 그 변절자의 조카였던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핵개발을 위해 그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최학근은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하며 성과를 내기 위해 애썼다. 충성심을 인정받고 김일성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김일성이 최학근을 IAEA 본부에 파견한 것도 그의 남다른 충성심 때문이었다. 최학근은 역시 그 믿음에 보답했다. 그는 IAEA 도서관에서 세계 각국의 원자로 설계도면 등, 원자력에 관련된 상세한 자료들을 모두 복사해 북한에 넘긴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도 미국의 핵무기는 계속해서 남한으로 들어와 배치되었다.

1961년에는 사정거리 1,800킬로미터의 메이스(Mace) 미사일이 들어왔다. 미국이 소련을 목표로 터키에 주피터와 토르 중거리 핵미사일을 실전 배치한 것처럼, 남한에 배치시킨 핵무기도 소련과 중국을 노리고 있었다.

1961년 9월 11일부터 18일 사이 평양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도상록 박사는 핵연구와 핵전문가 양성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963년 자강도 강계 국방대학에 원자력 공학과를 설립하였다.

1962년 1월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IRT-2000 원자로(제1연구용 원자로) 건설에 착수하여 1965년 8월 15일에 최초 임계에 성공했다. 소련의 기술자들도 북한에 들어와 IRT-2000 원자로 건설과 운전가동에 필요한 제반기술을 이전해 주었다. 그리하여 소련 기술자들이 철수하자마자 북한은 곧바로 원자로를 가동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의 열 출력은 2,000킬로와트였으나 북한이 독자적으로 개량에 성공하여, 80% 농축 우라늄 연료를 쓰며 열 출력은 8,000킬로와트에 달하는 원자로가 되었다. 북한은 거듭되는 연구와 축적된 경험으로 애초 2MW급이었던 IRT-2000 원자로를 5MW로 확장하였고, 궁극에 가서는 7MW급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1964년 10월 중국이 1차 핵실험에 성공한 후, 김일성은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을 만나 핵개발 협력에 관한 도움을 청했다. 그때 모택동은 “중국은 인구도 많고, 국가도 크다. 체면이 필요하다. 그래서 핵개발을 했다. 조선이 거기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하며 인민해방군 관계 책임자를 불러 “이번 핵실험에 든 비용은 얼마인가” 하고 물었다. 그에 그 책임자가 귓속말로 전하려 하자 모택동은 “김일성 동지 앞이라면 문제가 없다. 말해라”고 지시했다. 이어 그 책임자가 밝힌 비용은 ‘20억 달러’로 그 시기에 열린 도쿄올림픽의 개최 비용이었던 28억 달러에 맞먹는 거액이었다. 당시의 북한으로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비용이었다. 모택동은 그 사실을 알려 김일성의 제의를 사양한 것이다.

1964년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핵무기 보유에 성공한 중국이 미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이 한반도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괌에 B-52 핵폭격기를 배치하고, 전략핵 잠수함인 폴라리스를 실전 배치하여 아시아에 대한 핵전력을 강화한 것은 그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2년 김일성은 원자력 반도체, 전자 부문의 발전과 연구를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평안북도 박천군 맹중리에 108 연구소가 생겨났다.

1972년 남한은 프랑스와 손을 잡고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재처리장비와 기술 확보를 위해 나섰는데 남한이 선택한 핵폭탄은 플루토늄을 원료로 한 핵폭탄이었다. 그에 따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플루토늄제조용 재처리 공장 건설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미국과 캐나다에 근무하는 한국인 핵과학자, 전문가들을 은밀히 포섭하며 해외에서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장비들을 도입하기도 했다.

1974년에 이르러 남한은 연 20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 기술 설계도를 완성하고,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자폭탄 2개를 만들 수준의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

1972년 11월 30일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가입을 추진하며 박관오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대리 명의로 아래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개발을 위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가입을 희망합니다. 아울러 시험원자로 이엘 떼(ERT)에 쓸 핵연료봉 30개(우라늄 235, 무게 5천130g)를 소련에서 수입하게 되는 것과 관련하여 IAEA의 해당 절차를 준수할 용의가 있습니다.”

1972년 12월 13일 IAEA 사무차장 홀(Hall)은 오스트리아 주한 대사 이성가를 불러 말했다. “북한으로부터 이런 서신을 받은 것은 처음입니다. 그 의도를 아직 파악할 수 없지만 북한이 한국보다 먼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 측이 이번 기회에 NPT에 가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한국 외무부 장관 김용식은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 가입을 추진한다는 보고 받고 이성가 대사에게 정부차원의 지시를 전달했다.

‘북한 측의 IAEA 가입을 저지하기 위해 IAEA 사무국 당국과 접촉하여 그 결과를 수시 보고하고, IAEA 사무국 측의 북한에 대한 답신 내용이 어떤 것이 될지에 대해서도 가능하면 조용한 방법으로 타진해서보고하라.’정부의 지시에 따라 이 대사는 IAEA 사무국을 찾아갔다. 그때 사무차장 홀이 말했다.

“북한 측에 NPT 가입 의사 및 안전조치 적용 의사를 타진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만일 북한이 먼저 NPT에 가입하고 전격 비준하면, 앞으로 북한의 IAEA 가입을 한국 측이 저지하거나 활동을 하는 데 다소 난처한 입장이 될 것인 만큼 북한보다 먼저 NPT에 가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973년 1월10일 당시 과학기술처는 외무부에 아래 내용으로 공문을 보냈다.

‘북한이 IAEA에 가입하면 IAEA 내부에서 북한과의 경쟁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또한 북한이 IAEA 통제를 받게 됨에 따라 북한 자체 핵무기 개발 위험성이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아울러 가능하면 북한의 IAEA 가입을 저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처럼 한국 정부는 북한의 IAEA 가입을 은밀히 저지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북한은 1974년 9월 16일 국제원자력(IAEA)에 가입했다.

그리고 IAEA 도서관에서 세계 각국의 원자로 설계도면 등, 원자력에 관련된 상세한 자료들을 모두 복사해 가져간 것이다.

1973년 김일성종합대학에 핵물리학과가 개설되고 김책공업대학에 핵전기공학과, 핵연료공학과, 원자로공학과가 개설되었다.

1974년 3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 회의에서 원자력법을 제정하도록 결정하였다.

1974년 9월 16일 북한이 IAEA 국제원자력기구에 가입하였다.

1975년 최학근을 IAEA 본부에 북한 영사로 임명하고 파견하였다.

1974년 11월 주한 미 대사관은 본국에 보낸 1급 기밀 정보에서 한국이 핵무기 개발 첫 단계를 추진 중이라고 보고하였다.

1975년 2월 말경, 미국의 정보기관은 ‘한국은 향후 10년 안에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그에 따라 미국은 한국에 대한 대응책으로 전진 배치 되어있던 핵무기를 후방인 군산 미공군기지에 있는 저장시설로 이동 배치했다.

1976년에 들어와 미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 주한미 대사인 스나이더,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차관보 하비브 등은 한국정부에 ‘핵무기 개발을 강행할 경우 안보 및 경제 협력관계를 포함해 한국과의 모든 관계를 재검토 할 것’이라고 전방위적인 압력을 행사했다. 그에 따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핵 프로그램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핵무기 개발 계획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극비리에 핵무기 개발팀을 한국핵연료개발공사에 흡수시키고 원자로에 쓸 핵-연료봉을 제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77년 5월 카터 행정부는 정책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공식화했다. 미국의 철군계획에 따르면 1978년 제2보병사단의 1개 여단 6,000명을 즉각 철수하고, 1980년 6월말까지 두 번째 여단과 모든 비전투병력을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잔여 병력과 미군사령부, 핵무기의 완전 철수는 1982년도까지 완료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한국정부는 군사원조의 증액과 전술핵무기에 대한 남한 잔류를 간절히 요구하였지만 미국은 단호히 거부했다. 당시 남한에 배치된 미군 핵무기의 총 수량은 250기로서, 절정기 때 700기에 이르렀던 것에 비하면 그 양이 3분의 1정도로 줄어든 수량이었다.

1978년에 들어와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미국에 국가안보를 전적으로 의존하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핵개발 프로젝트를 재가동하였다. 프랑스와 핵개발 시설에 대한 협상도 다시 시작하였다.

1979년 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청와대 공보비서관인 선우련에게 “1981년 상반기 중핵무기 제조를 완료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81년 국군의 날 행사 때 이 핵무기를 대외에 공개하고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해 10월 26일에 암살되었다.

그 시기 북한은 김정일위원장이 후계자로 등장하면서 핵개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수령님대에 핵개발을 완성하려고 합니다. 이는 나의 단호한 결심입니다.”그 의지에 따라 북한의 핵개발은 1980년데 들어서면서 본격화되었다.

1982년에 5MWe 원자로 건설과 함께 원자력주체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구소련과 합작했던 흑연생산 공장을 우라늄생산 공장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핵연료봉 생산 공장도 새로 건설되었다.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재처리시설(12월기업소―방사화학실험실)도 그 즈음에 생겨났다.

1983년부터 우라늄 농축의 주체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1984년 10월 김정일위원장의 특별지시로 전방 군단(1군단, 2군단, 5군단)들에서 사관들을 모집하여 핵개발부대를 조직하였다. 초기에 1248군부대, 1249군부대를 조직하였다.

(나는 1248군부대에 소속되었다.) 그후 핵개발부대인 공병 3국에 흡수되었다.

1985년 철도 복선공사를 위해 조직했던 공병 3국을 핵개발부대로 전환하였다. 김정일위원장은 핵개발의 최고사령관이 되겠다고 자처하며 핵개발부대는 자신의 친위대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그 핵개발부대를 중앙당 131지도국에 소속시켰다. 북한에서 노동당에 소속된 군대는 그 핵개발부대가 유일무이하다. 전 세계적으로도 역시 당에 소속된 군대는 그 핵개발부대가 유일무이하다. 그 즈음 평양에서 김일성주석과 김정일위원장의 지하요새를 건설했던 공병 1여단도 핵개발부대로 전환되어, 평안북도 대관군 청계리 천마산 지하핵시설 건설에 동원되었다.

1985년 8월 5일 핵개발에 동원되었던 1248군부대, 1249군부대에서 400명을 제대시켜, 영변 핵단지 8월기업소(핵연료봉 생산 공장)에 300명, 4월기업소(우라늄생산 공장)에 100명을 배치하여 생산인력을 충당하였다.

1985년 11월 핵개발부대 48여단은 영변 핵단지에서 50MWe 원자로 건설을 착공하였다.

1985년 12월 12일 북한은 핵방지조약기구 NPT 가입하였다.

1986년 5MWe 원자로 가동에 성공하였다.

그해 전국 전문대학들에서 300명의 졸업생들을 모집하여 재처리시설인 12월기업소(방사화학실험실) 생산인력을 충당하였다.

1987년 김일성주석은 북한의 핵개발에서 가장 큰 성과는 우라늄 농축기를 주체화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해 폐연료봉 재처리실험(플루토늄 추출실험) 과정에 생기는 맹독성 가스와 방사능 피해로 관련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쓰러져 평양시 남산 진료소(최고위층 전용병원)에 후송되어 3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1987년 9월 4월기업소(우라늄생산 공장)에서 100여 명의 기능공들을 평산 지구에 대규모로 건설 중인 우라늄생산 공장(남천화학공장)으로 소환하였다.

1988년 10월 황해북도 평산 지구에서 우라늄 광산을 개발 확장한 49여단은 평안북도 대관군 청계리, 금창리 일대의 지하 핵시설 공사에 투입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1985년에 이미 49여단의 기본 주력이 금창리, 청계리 일대의 지하 핵 시설 공사에 투입되었고, 평산 지구에 투입되었던 일부 부대가 그곳에서 우라늄 광산 개발및 확장 공사를 완료하고 다시 자기 여단으로 복귀한 것이다.

1989년 초 김일성주석과, 김정일위원장이 영변 핵단지를 방문해 플루토늄 추출 성공을 높이 치하 하였다. (구소련에서 밀수한 붉은 수은으로 플루토늄을 추출함.) 김정일위원장은 전병호 비서에서 관련 과학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라고 지시하여, 일본에서 도시바 칼라 TV를 수입하여 선물하였다. 간접 분야의 우수자들에게는 북한산 대동강 TV를 선물했는데 본인은 북한산 대동강 TV를 받았다.

1989년 9월 프랑스의 상업위성 SPOT 2호의 촬영에 의해 영변 핵단지의 재처리 시설이 전 세계에 공개되었다.

1989년 11월 영변 핵단지의 5MWe 원자로가 100일간 가동을 정지하게 되므로, 미국정보기관은 그때 정지된 원전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했을 것으로 예상했다.

1990년 북한이 IAEA에 신고한 내용을 보면 단1회의 재처리를 통해 80그램의 플루토늄을 재처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IAEA가 방사화학실험에서 채취된 샘플을 정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소한 3회(1989년, 1990년, 1991년)에 걸쳐 총 8Kg의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9년에 평안북도 태천에서 200MWe 흑연감속원자로 건설에 착공하였다.

1990년 6월 20일 황해북도 평산지구 남천화학연합기업소 화학공장(우라늄생산 공장)이 조업하여, 월 7톤 정도의 우라늄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 6월 21일 미국 카네기 평화연구소는 미국이 한국 군산 공군기지에 F-16 폭격기에 실을 수 있는 핵무기 60개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미국이 핵 지뢰 21개, 8인치 핵탄두포 40대, 155밀리 핵탄두포 30대, 핵탄두가 장착된 랜스 미사일 20개를 대한민국에 배치했다고 밝혔다.

1990년 7월 30일 미국 정부 관계자는 IAEA 협정체결의 조건으로 미국이 한국에서 핵무기를 철수시키라는 북한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밝혔다.

1990년 9월 26일 김일성주석은 북한이 IAEA 핵사찰을 받을 경우 남한도 핵사찰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0년 10월 18일 소련은 북한이 IAEA 안전조치 협정에 합의할 때까지 북한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1987년부터 북한은 소련과 합작하여 함경남도 신포 지구에 동해발전소라는 명칭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추진했었다. 하지만 그 후 중단되었다.

1990년 11월 2일 일본 외교부 대변인은 북한이 IAEA와 핵 시찰에 합의 했으나 미국의 핵 위협이 철회되지 않은 상태에서 핵 시찰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으로 표명했다.

1990년 11월 16일 북한 외교부 성명은 한반도 비핵화와 미국의 핵위협 철회 후에 IAEA 안전보장 협정에 합의할 것이라고 표명하며, 미국의 핵 위협 철회에 관해 문서로 된 보장을 요구했다. 그리고 주 유엔대사는 IAEA 사찰 수락조건으로 주한미군 핵과 북한 핵 시설 동시사찰을 제의하였다.

1990년 12월 14일부터 17일 사이 노태우 전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1991년 4월에 고르바초프 대통령 내외가 제주도를 방문함으로서 한국과 소련의 양국관계는 절정에 달했다. 아울러 소련에 대한 북한의 배신감도 초절정에 이르렀다. 결국 북한과 소련의 과학기술 교류협력도 끝나고 듀브나 핵연구소에서 북한 과학자들이 철수하였다. 그때 김정일위원장은 구소련의 핵과학자들과 미사일 전문가들까지 포섭하여 북한으로 데려올 것을 은밀히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듀브나 핵연구소에 파견되어 있던 북한의 과학자들은 구소련의 핵과학자들과 미사일 전문가들까지 포섭하여 북한으로 데려가는 역할을 활발히 진행하기도 했다.

1991년 10월 핵개발 부대 47여단에서 1개 대대를 조직하여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 핵미사일 기지 건설에 파견하였다. 그해 초에 군사 건설국이 건설한 미사일 기지에서 첫 발사 시험이 있었고, 그 후 군사건설국이 철수하고 핵개발 부대인 47여단에서 1개 대대를 파견하여 핵미사일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곳은 한반도에서 일본 동경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으로서 대일 전략기지이기도 하다. 그 시기 길주군 풍계리 일대에서 핵실험장 지하시설도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다.

1992년 1월 평산 지구 우라늄생산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다. 조업을 시작한지 1년 6개월 만에 가동을 멈춘 것이다. 우라늄생산에 첨가되는 항공석유와 탄산소다 등이 고갈되어 우라늄을 생산할 수가 없었다. 우라늄 광액을 운반하는 스텐관들도 다 닳아서 구멍이 났지만 그 관들을 제작할 스텐이 없었다. 일본에서 그 스텐 자재들을 수입하여 썼는데 핵개발자금이 다 떨어져 수입할 수가 없었다.

우라늄 광액을 퍼내는 펌프날개도 다 닳았지만 교체할 수가 없었다. 우라늄생산 시설은 우라늄 침출탱크, 우라늄 추출탱크, 우라늄폐기물처리탱크 등 많은 탱크들이 있는데, 그 탱크들의 내벽은 내산벽돌로 먼저 쌓고 그 바깥에 납을 씌우고 거기에 에폭수지를 바르는데 그 자재들도 없어서 보수공사가 중단되었다. 즉, 우라늄생산 시설의 탱크들을 해체해 놓은 상태에서 보수공사가 중단된 것이다.

우라늄광석을 운반해야할 트럭들의 타이어도 다 닳았지만 교체할수가 없었다. 게다가 휘발유, 디젤유도 이미 떨어져 트럭들조차 모두 주저앉고 말았다. 북한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건 1987년 가을부터이다. 우선 전력부족으로 기차들이 도중에 서는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을철에 농촌에서 탈곡기도 제대로 돌릴 수 없는 어려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방 공장들도 전력부족으로 기계를 제대로 가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정일위원장의 지시로 교차 생산제가 도입되고, 밤에만 기계를 돌리는 공장과 낮에만 기계를 돌리는 공장들이 생겨났다. 원자재마저 떨어져 기계조차도 돌릴 수 없게 되자 노동자들은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베어다가 광주리나 빗자루를 엮어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무슨 일이든 하여야 했던 것이다. 북한 기계공업의 상징인 대안중기계공장도 가동을 멈추었다. 제철소, 제련소들도 가동을 멈추었다. 방직공장들도 천이 없어서 일체 가동을 멈추었다. 북한의 대표적인 남포 유리공장도 생산가동을 멈추었다. 유리생산에도 탄산소다가 첨가되는데 재료를 수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 휘발유 디젤유마저 떨어지자, 대신 나무 숯을 태워서 달리는 트럭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월급도 끊기고 주민들의 식량배급도 중단되기 시작했다. 군인들도 식량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통강냉이를 삶아서 끼니를 해결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미사일생산 공장도 가동을 멈추고 노동자들은 공장 시설들을 훔쳐다가 식량을 바꿔먹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정집들에도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등잔불을 켜기 시작했다. 평양시도 밤 10시 이후에는 전기공급이 중단되었다. 전기로 달리는 궤도전차도 끊기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도 가동을 멈추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역주민들의 식량배급은 완전 중단되고 평양시만 겨우 50% 식량이 배급되었다. 그러자 지역주민들 사이에서“전쟁나면 지금까지 잘 먹고 살아온 평양시만 싸워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핵개발 공장들은 정상가동을 하였다. 북한에서 최후의 보루로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1992년에 들어서면서 그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져 내렸다. 우라늄생산이 전면 중단되면서 연쇄공정인 핵연료봉 생산도 중단되었다.

1985년 11월에 영변 핵단지에서 착공한 50MWe 흑연감속원자로 건설도 중단되었다.

1989년에 평안북도 태천에서 착공한 200MWe 흑연감속원자로 건설도 역시 중단되었다. 그 원자로 건설에 동원된 핵개발부대 군인들은 원자재가 없어 공사를 중단하고 농사에만 전념했다. 미국은 원자로 건설을 중단시키고 핵연료봉 생산을 동결시키는 목적으로 많은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는 북미 제네바회담 협정서를 체결했는데, 이미 그 2년 전에 핵개발 시설들이 동결된 것이다. 평안북도 대관군 일대에 건설하던 지하핵시설 공사도 중단되었다. 함경북도 무수단 핵미사일 공사도 중단되었다. 그 일대에서 진행 중이던 핵실험장 공사도 중단되었다. 공사에 동원된 핵개발부대 군인들도 할 일이 없어지자 농군으로 전락하였다. 그 부대의 27살 이상 군인들은 제대하여 우라늄생산 공장으로 배치되어 왔다.

그렇게 우라늄생산 공장에는 북한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핵개발정보들이 모여들었다.

그 후 영변 핵단지에서는 더 이상 핵개발을 할 수 없게 되자 노동자들에게 “떠나고 싶은 사람은 다 떠나도 좋다. 그리고 공장이 가동할 수 있게 되면 그 때에 다시 부르겠다”며 내보내기까지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또한 희천 38호 군수공장에서는 미사일 유도장치를 생산하려고 해도 외화가 없어서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 시기 동구권의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한데 이어 사회주의 종주국이던 구소련도 붕괴되고, 러시아는 제 살길을 찾기에 바빠 북한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중국도 등소평의 주도로 개혁 개방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여서 역시 북한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미국의 대북 경제봉쇄조치는 북한의 경제를 완전히 몰락시킨데 이어, 북한의 마지막 보루이던 핵개발마저 동결시키기에 이르렀다. 북한의 핵개발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울러 그와 같은 기회는 역사에 다시없을 것이다.

사실 1991년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우라늄생산량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우라늄생산에 필요한 항공석유, 탄산소다, 황산과 같은 첨가제들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 우라늄광석을 운반해야할 트럭들의 절반 이상이 다 닳은 타이어를 교체하지 못해 주저앉았다. 거기에다 휘발유, 디젤유 공급도 대폭 줄었다.

710호 핵개발자금이 고갈되면서 나타난 어려움이었다. 우라늄생산 공장이 조업을 시작한지 1년도 되기 전에 난관에 부딪친 것이다. 핵개발부대 3공병국에서 진행하던 핵시설 건설들도 모두 중단위기에 처했다.

그때 김정일위원장의 6월 21일 친필지시가 있었다.

핵개발자금을 자체로 해결하라는 지시였다. 그에 따라 핵개발부대에 부흥무역회사가 생겨났다. 우라늄생산 공장의 직장들에서도 외화벌이 사업이 진행되었다. 내가 근무한 직장에서는 대회의실을 비우고 거기에서 누에를 쳤다. 우라늄생산이 멈추었을 때는 노동자들을 총동원하여 뽕잎을 따오게 했다. 또 누에를 관리할 수 있는 전문 인력도 따로 배치했다. 그리하여 1991년 한 해에 누에치기를 두 차례 했다. 그 외 황해북도 린산군 산골에 인력을 파견하여 목이버섯 재배도 하였다. 나는 직접 현장에 가서 목이버섯 재배를 지휘하였는데, 비가 온 다음날에는 죽은 참나무 가지에서 많은 목이버섯이 돋아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우라늄생산 공장을 다시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해 1991년 말에 이르러 우라늄생산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핵개발 지도부는 대책회의를 거듭하고 나서, 바나듐을 수출해서 우라늄생산 공장을 다시 돌릴 수 있는 외화를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992년 1월부터 우라늄생산 공장은 바나듐생산에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나는 그 바나듐생산을 책임지고 현장지휘를 했다.

그런데 미국의 경제봉쇄에 막혀 수출 판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핵개발총책인 전병호 비서는 남천화학연합기업소 자체 역량으로 핵개발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연합당 책임비서에게 지시했다.

연합당 책임비서 김주식과 연합기업소 지배인(그룹회장 오인현)은 그 적임자로 나를 추천했다. 우라늄생산 공장 조업을 앞두고 봉착했던 난제를 해결한 능력으로 우라늄생산 공장을 다시 돌릴 수 있는 외화를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전병호 비서로부터 김정일위원장의 6월 21일 친필지시문을 받았다. 붉은색 책표지에 금박으로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의 6월21일 친필지시문”이라고 쓰여져 있고, 그 안에는 710호 핵개발자금을 자체로 확보하라는 것과 전국 당, 군, 행정기관, 기업소들에서 710호 사업을 적극 협조하고 지원하는 것에 대한 지시가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그 지시를 집행하다가 여기 남한에까지 왔다. 그리고 남한에 와서 그 생생한 정보를 제공하였지만 당시 남한의 정보기관에 의해 그 진실은 철저히 은폐되었다.

1994년 4월 27일 나는 대한민국 정부가 극비리에 파견한 군함을 타고 남한으로 와서, 북한의 핵개발이 이미 2년 전에 대부분 동결되었다는 정보를 제공하였다.

4월 29일 북한은 영변 핵단지 원자로에서 제거된 핵연료봉 샘플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서신을 IAEA에 전달하며 미국을 압박했다. 북한 핵개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그 원자로뿐이었는데 마지막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5월 2일 미 국무부는 북한이 IAEA 사찰단이 부재인 상태에서 핵연료봉을 제거한다면 모든 형태의 대화를 중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5월 3일 국제원자력기구가 영변 핵단지 원자로에 핵연료봉 재충전에 대한 IAEA의 시찰을 요구하는 서신을 북한에 전달하자,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IAEA가 보낸 서신에 대한 거부 의사를 표명하며 미국과의 줄다리기를 시도했다.

5월 4일 북한은 5MWe 원자로에서 핵연료봉 무단인출을 시작하며 미국을 압박했다.

5월 9일 미국은 사찰단이 도착할 때까지 북한의 핵연료 재충전을 연기해 줄 것을 북-미 실무회담 (뉴욕)에 요청했다.

그날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나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그 기자회견에서 밝혀졌어야 했다.

이미 2년 전에 북한에서 우라늄생산이 중단되었으며, 핵연료봉 생산까지 중단된 사실이 반드시 밝혀졌어야 했다. 그 외 북한의 핵개발이 이미 2년 전에 대부분 동결되었다는 사실도 밝혔어야 했다. 당시 북한의 자체기술로는 플루토늄추출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정밀기술의 낙후로 핵실험조차도 할 수 없었다는 것도 밝혔어야 했다. 그러면 미국은 북한의 5MWe 원자로가 2년 전에 생산된 핵-연료봉으로 간신히 가동하고 있고, 이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판단했을 것이다. 아울러 미국의 대북 경제봉쇄가 이미 성공했고 마지막 한 수만 남겨 놓고 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 판단은 미국의 대북협상전략을 바꾸어 놓았을 것이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남한의 정보기관은 미국이 그런 판단을 할 수 없도록 나의 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나의 신분을 폐수처리작업반장으로 조작하고 거짓된 기자회견을 시킨 것이다.

5월 20일 미국은 북-미 고위급회담 재개를 결정했다. 북한은 핵-연료봉 압박 작전으로 미국을 고위급회담장으로 끌어내는데 비로소 성공한 것이다.

남한 정보기관에 의해 조작된 기자회견으로 인해, 북한의 핵개발이 이미 2년 전에 대부분 동결되었다는 사실이 철저히 은폐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6월 24일 북-미간 실무접촉 및 고위급회담을 거쳐 제네바 기본합의문이 체결되었다. 북미 제네바회담 합의문의 기본내용은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시키는 대가로 매년 200만㎾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경수로 2기를 건설해 주고 완공 때까지 매년 중유 50만t을 공급해주는 조건이었다. 남한 정보기관이 내 입을 막고 미국의 눈과 귀를 막음으로서 그처럼 바보 같은 협정서가 체결되게 된 것이다.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였다.

김일성주석이 사망한 와중에도 제네바에서는 제3단계 1차 북미회담이 진행되었다.

8월 15일 김영삼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북한이 핵 투명성을 보장하면 경수로 지원 용의가 있다고 천명했다. 당시 경수로 지원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자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 잘못된 선택으로 남한은 북한 신포 지구에서 10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내고 450억 원 어치의 장비를 버려둔 채 철수해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북협력기금 경수로 계정의 부채 11억3700만 달러를 북한에 제공하였다.

경수로 지원대신 북한의 핵에너지 개발을 남북이 합작하고 거기서 생산된 핵연료봉 전량을 남한의 원자로에 가져와 소비하며 북한에 전기를 공급해주고, 또 남한에서 소비할 전력생산을 위해 소비되는 핵연료봉도 북한에서 수입하는 시스템을 마련했더라면 북한의 핵문제는 가장 빠르고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당시 보수정권의 지능은 매우 낮은 수준이어서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시간 나는 정보기관의 작은 방에 갇혀 있었는데 창문에는 철창이 쳐있고, 방안에는 24시간 감시하는 카메라가 작동하고 있었고, 문 밖에는 24시간 지키는 무장보초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철창 밖의 하늘만 쳐다보며 가슴만 치고 있었다.

10월 21일 북미 제네바회담 합의서에 서명하였다. 그 후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시켰다는 자신감에 도취되어 긴 연휴를 보내며 북한에 40억 달러 이상의 지원을 하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 매년 1억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

한국정부도 제네바회담의 합의 이행에 따라 북한에 11억3700만 달러를 제공하였다. 이처럼 당시 남한의 보수정부는 북한에 엄청난 기회를 제공하였고, 북한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이미 동결되었던 핵개발을 재건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2002년 10월 3일 미국 특사 제임스 켈리 일행이 평양을 방문했다.

다음날 10월 4일 아침 북한은 켈리 일행에게 “우리는 우라늄 농축 핵개발은 물론 더 무서운 것도 가지고 있다”며 큰소리로 외쳤다.

2006년 10월9일 10시35분 북한은 1차 핵실험을 진행하였다.

12년 전 1994년 제네바회담 전까지만 해도 정밀기술의 부족으로 핵실험조차 할 수 없었던 북한이었다. 그런데 그 제네바회담 이후 미국과 남한에서 많은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12년 동안 핵실험을 할 수 있는 정밀기술을 습득한 것이다.

하지만 그 핵실험도 정밀기술의 부족으로 20분의 1정도만 겨우 폭발하였다.

그리고 3년 후 2차 핵실험에서 정밀기술이 보완되었다.

2009년 5월 25일 북한은 2차 핵실험을 진행했다.

이때 핵실험은 1차 핵실험에 비해 20배 이상 큰 폭발력을 나타냈다.

2013년 2월 12일 북한은 3차 핵실험을 진행하였다.

하루 전날 북한은 미국과 중국에 핵실험을 진행 중이라고 통보하였다.

2016년 1월 6일 북한은 4차 핵실험을 진행하였다.

2016년 1월 6일, 한국 시간으로 오후 12시 30분에 조선중앙TV는 중대발표를 하였는데, 2015년 12월 15일 김정은의 명령으로 추진한 수소폭탄 실험이 성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중앙TV는 김정은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수소탄 실험 명령서에 사인하는 모습과 친필실험 명령서를 공개하기도 하였다.

북핵전문가 김대호 dhk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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