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스피치 대표

세종은 회의를 진행하면서 늘 인재들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중시했고, 그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지혜를 모았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충녕대군이 왕위에 즉위한 이후, 첫 마디가 ‘소통을 해 보자’였다고 한다. 세종은 다른 왕들과는 달리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신하의 의견까지도 언제나 끝까지 경청하며 존중했다.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만의 독단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세종의 크나큰 장점이었다.

세종은 자신의 삶을 통해 작금, 지도자의 올바른 자세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삶으로 행하고 보여준 세종의 가르침은 미래 세대를 준비하고 나아갈 사람들에게 그 가야 할 방향성과 가치를 제시하기에 충분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왜 세종 대에는 유독 창의적 인재가 많았을까? 과학으로는 이천과 장영실, 학문으로는 성삼문 같은 집현전 학자들, 음악에는 박연, 관료로는 황희, 국방으로는 쓰시마와 여진족 정벌에 성공한 최윤덕과 6진을 개척한 김종서 등이다.

예컨대 태종이 남긴 업적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을 예를 들면 바로 세종을 왕으로 세운 일이 될 것이다. 세종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어깨를 견주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학문적 깊이를 갖춘 책벌레였고, 인정 많고 마음씨 좋은 어진 선비였으며, 형제우애도 잃지 않았다. 또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벗이었고,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할 줄 아는 냉철한 판단자였으며, 상대방의 그릇을 잴 줄 아는 현명한 지도자였고, 또 국민들의 행복한 삶을 구현하는 꿈꾸는 사상가이기도 했다. 

세종은 인재를 단번에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남다른 용인술이 있었으며,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을 높이 살 줄 아는 폭넓은 아량이 있었다. 다른 왕 아래선 전혀 핵심역량을 인정받지 못하던 인물도 세종을 만나면 제대로 날개를 달았다. 다른 시대에는 쓸모없는 지식으로 여겨지던 학문도 세종의 시대에는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세종이 인재를 등용시켜 널리 인사 배치된 인재들의 공통점이 첫째로 청렴성이란 점이다. 황희와 맹사성은 세종의 정치적 동반자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세종을 보필해 왔다.

황희는 영의정을 18년간 역임할 정도로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맹사성은 80세가 넘은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항상 자문을 구하던 신하였다. 비록 유관은 세종대에 오래 살지는 못했으나 청백리의 표상으로 불리며 그의 사후에 세종이 유일하게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세종의 인재등용 정책은 그가 치적을 쌓을 수 있었던 근간이 되었다. 세종은 정승 재상(판서) 등 주요 요직에 인물을 등용할 때에는 친분을 철저히 배제한 채, 가장 먼저 자신이 원하는 인재상의 조건에 맞는 인물을 찾았다.

한편으로 공적이 아무리 뛰어나도 말이 미흡하면 재상에 등용하지 않았다. 요컨대 세종으로부터 가장 신임을 받았던 재상 황희는 비록 부도덕한 사건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긴 했다. 하지만 황희는 논의 중 의견을 정리하는 능력만큼은 단연 최고였다. 세종이 정신없이 회의를 진행할 때면 황희가 최종에 ‘이 문제는 이렇고 저 문제는 저렇게 되어 각 문제의 해결사는 누구’라는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만큼 황희는 뛰어난 인재였던 것이다.《세종실록》에도 ‘황희의 말대로 하라’라는 문구가 많이 실려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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