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통 발행인

겨울이다. 눈이 오는 날은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나 뿐일까. KTX가 아니라 간이역마다 쉬어가는 그런 기차, 간이역에 내려 입김을 내어불며 국수라도 마실 수 있는 그런 기차 말이다. 눈이 내리는 플랫폼에서 오래도록 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은 외로움도, 그리움도 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기차를 모두 폐기처분해버렸다. 나이 들어 병든 어머니 아버지를 요양원에 맡겨놓고 잊어버리듯 그렇게 없애 버렸다. 그래서 눈이 오는 도시는 더욱 쓸쓸하다.
도심의 땅속을 헤엄쳐 다니는 지하철에서는 낭만을 찾을 수 없을까?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도 낭만이 흐른다. 필자는 요즘 지하철에서 초로(初老)의 로맨스그레이 한사람을 만났다. 초로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지만 머리끝이 희끗희끗하고 피부는 한없이 곱다. 정년을 앞에 둔 교수이거나 아니면 언론인 출신의 논객, 그마저 아니면 늦깎이 시인인 줄도 모른다.

그는 거의 매일 아침 상무역에서 지하철을 탄다. 대게 8시에서 8시 20분 사이에 상무역에 가면 며칠에 한 번씩은 꼭 그를 만난다. 그는 언제나 책 한권을 들고 있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면 어김없이 책을 편다. 어느 날은 광주출신 이성부 시인의 ‘무등산’이라는 시를 읽고 있었다.

콧대가 높지 않고 키가 크지 않아도/ 자존심이 강한 산이다/ 기차를 타고 내려 가다 보면 / 그냥 밋밋하게 뻗어 있는 능선/ 너무 넉넉한 팔로 광주를 그 품에 안고 있어/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느냐

어느 날은 시인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내 나이 쉰줄엔’ 이라는 시를 읽고 있었다.

일부러 시간 내어 영화를 보며 눈물도 흘렸으면 합니다/ 옛 친구에게 편지 한 장 쓸 시간이 있었으면 합니다 / 휴일이면 시간 내어 못 찾아본 사람들을 찾아봤으면 합니다/ 어미 새처럼 한 걸음 물러서서 자식들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때때로 아내와 자식들 발 씻어주는 남편과 아내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내의 고향과 내 고향을 손잡고 돌아볼 시간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는 이 시를 읽으면서 긴 한숨을 들이 쉬었다. 나도 까닭 없이 숨을 들이 쉬었다. 며칠 전에는 일본에서 아들러 심리학 열풍을 일으킨 기시미 이치로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날은 만원이어서 어깨에 책을 끼고 기대어 서 있었는데 그 모습만으로도 아름다웠다. 나는 그가 누군인 줄 모른다. 아니 그냥 모르고 싶다. 창 넓은 찻집에서 차라도 한잔 나누고 싶지만 ‘아침행복’이 깨어질까봐 그냥 모르고 지내기로 했다.

그를 만나지 못하는 날은 쓸쓸하다. 온통 스마트 폰을 들고 중얼거리는 청소년들, 상냥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험상궂은 얼굴들, 그리고 다리를 쫙 벌리고 앉아 있는 ‘쩍벌남’ 이나 ‘쩍벌녀’ , 자리에 앉자마자 지저귀는 참새족들…, 나는 정말 어쩌다 만난 로맨스그레이가 아니라면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일본에 가면 지하철 승객의 상당수가 책이나 신문을 읽고 있다. 아니면 적어도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을 한다.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허리들기’는 기본이다.

광주는 예향이다. 문화지하철이라고 자랑한다. 간혹 지하철역에서 시를 낭송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그림전람회가 열리는 것도 안다. 그러나 문화중심도시, 광주의 지하철은 지금보다 뭔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기를 소망한다.
사람들이 시집을 읽은 지하철, 용아 박용철의 고향에 들어서면 용아의 시라도 한편 읊어주는 지하철, 아니면 출발에 맞춰 시그널뮤직으로 기적(汽笛)을 울리는 낭만 지하철은 안될까? 추억과 낭만을 동시에 안겨주는 기적소리는 찌든 현대인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약손이 아닐는지…

아, 눈오는 날, 기적소리. 그리고 로맨스그레이 그 사람과 만나고 싶다.

지형원< 문화통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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