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서민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인문 정신이 활짝 핀 세상을 기대해 본다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 옛 우리 선조들은 '백팔적덕(百八積德)'이라 해서 일 년에 108번 남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으로 덕을 베풀고, 그 적덕을 낙(樂)으로 여기는 풍속이 있었다.

예컨대 골목에 놀고 있는 아이를 데려다가 손발 씻겨 주기, 떨어진 옷자락 기워주기, 남의 집 가서 난잡하게 흩어진 신발 정돈해주기, 남은 음식 다리 밑에 사는 노숙자들 갖다 주기 등 날마다 작은 적선이라도 해서 덕을 쌓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이처럼 소박한 덕을 베푸는 인정 탓에 가난해도 평안했고 행복했던 것이 우리의 미풍양속이었다.

명문 고택을 답사하다 보면 서민들의 생활상과는 사뭇 다르지만 하나 같이 덕업을 가장 중시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벼슬을 했느냐?'는 것보다도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보편적 조건이자 기준이었다. 명문가의 조건도 벼슬보다는 그 집 선조들이 이웃과 사회를 위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정승 셋보다 대제학 한 명이 더 귀하고 대제학 셋 보다 처사 한 명이 더 귀하다(三政丞 不如一大提學, 三大提學 不如一處士)'고 했다. 벼슬이 높은 사람이 그 집안에서 배출돼야 명문가가 되는 게 아니라, 신분에 합당한 품격을 갖춘 삶을 산 인물이 배출돼야 비로소 명문가로 일컫는다.

명문가의 필수 조건으로는 고택, 재력, 명당이라는 하드웨어적 조건과 집안의 인물과 역사성, 도덕성, 그리고 사회에 대한 봉사와 적덕의 여부라는 소프트웨어적인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 이 중에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는 고택이 남아있지 않은 명문가 집안도 상당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집안은 한양에서 8대를 연이어 판서를 지낸 명문가이지만 일제 강점기 때 명동에 있는 고택을 팔아서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느라 고택이 없는 명문가의 예에 해당한다.

지리산 자락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운조루(雲鳥樓)라는 고택이 있다. 이 마을은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구몰니(金龜沒泥), 오보교취(五寶交聚) 등 3대 진혈이 있는 명당으로 꼽는다. 1776년 영조 때 낙안군수 유이주가 금환락지 혈에 터를 닦고 7년 건축공사로 99칸 집을 완성한 호남의 대표적 고택으로 현재 60여 칸이 남아 있어 호남 지방의 양반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안채로 들어서면 남의 집 사람도 능히 열 수 있다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쓴 쌀뒤주가 보인다. 흉년으로 식량이 없어 배곯는 이웃 사람들이 쌀을 가져가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했던 주인의 정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이다.

지리산 기슭의 구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유난히 질곡(桎梏)이 많았던 곳. 고려 때 왜구의 침략을 시작으로 한말 항일 의병, 동학농민운동, 빨치산, 여순 사건,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건들 속에서도 운조루가 250여 년 동안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인의 이웃 사랑 정신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경주 최 부잣집은 12대 만석꾼 9대 진사를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이다. 부자 삼년 가기 어렵다 해서 부불삼대(富不三代)라 했던가. 3대도 어려운 세상인데 12대 400여년을 지속할 수 있는 비결에는 주인의 특별한 철학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흉년에 논을 사들이지 말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과객을 후하게 접대하라' 등이 최 부잣집의 가훈이다.

인문 정신이 활짝 핀 세상을 꿈꾸며
흉년으로 굶어죽기 직전에 있는 사람의 논을 헐값으로 사들여 남의 가슴에 원한을 갖게 한다면 바로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다는 것이 절대적 이치이다. 최 부잣집도 과객을 위해 쌀뒤주를 여럿 비치해두고 과객의 두 손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을 뚫어 양손에 잡히는 만큼 쌀을 가져가도록 했다. 대지주의 넉넉한 배려이다.

옛 명문가들은 결코 혼자만 잘 살려고 하지 않았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함께 상생하는 것을 사회적 의무라 여겼다. 요즘 대기업들이 골목상품과 구멍가게까지 마구잡이식으로 잠식해가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때문에 옛 부자는 설사 망하더라도 이웃의 존경 속에 가문이 지켜졌지만, 오늘날 기업들은 망하는 즉시 패가망신 꼴이다.

덕을 쌓는 집안에 반드시 후손에게 경사가 있다는 '적덕지가 필유여경(積德之家必有餘慶)'이라 했던가. 한국 사람들 유난히 '덕(德)'을 좋아한다. 덕택(德澤), 덕분(德分), 덕망(德望), 덕음(德陰), 덕산(德山), 덕장(德將), 후덕(厚德) 등. 용장불여지장(勇將不如智將) 이요 지장불여덕장(智將不如德將)이라 해서 아랫사람을 통솔할 때 용맹이나 지혜보다도 덕으로 심복하게 하는 것이 최고라 했다.

해남 연동에 윤선도 고택 뒷산도 덕의 그늘에 쌓인 덕음산(德陰山)이다. 필자는 조선 5백 년 동안 가장 멋진 삶을 살았던 인물이 고산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85세를 일기로 귀천할 때까지 남도 땅에서 20여년 간을 출사와 유배 그리고 낙남과 은둔 등 부귀영욕의 감고(甘苦)를 겪으면서 곳곳에 예술적 혼과 풍류 흔적을 남겼던 이다.

예향 남도의 뿌리는 윤선도 고택으로 닿아있고 그의 예술혼은 증손인 윤두서와 후손 윤용에 이르기까지 150여 년 동안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의 예술과 다산 정약용의 실학 집대성까지 영향을 미친다. 해남 윤씨의 종가인 고택, 윤선도의 낙원 보길도 부용동 등 고산은 남도의 대표적 부잣집,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러나 결코 윤선도를 혼자서 호사를 누린 사람이라 후세 사람들이 매도하지 않는다. 결코 그가 사회적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그런 시대정신에 투철했던 때문이다.

진도 임회면 굴포리에 가면 윤선도가 주민들의 식량난 해소를 위해 간척 사업을 했던 유적이 있다. 이에 감사한 굴포리 주민들은 윤선도 사적비를 세우고 감사의 뜻을 표한다고 하니 사대부의 사회적 의무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나눔과 메세나 운동이 절실하게 회자되고 있다. 부자와 서민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인문 정신이 활짝 핀 세상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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