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사기꾼이 너무 많다

#1

아들이 생후 백 일도 안 됐을 때, 직장에서 인천으로 발령이 났다. 처음엔 인천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직장의 사업소장이 초등학교 2년 선배였다.

평소 일 잘하고 의리도 깊었던 나를 잘 보았던지 소장은 “나를 좀 도와 달라!”며 간곡히 동행을 요청했다. 하는 수 없어 핏덩이 아들을 등에 업고 아내와 인천으로 이사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소장은 아들의 백일잔치를 불과 며칠 앞두고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를 철석같이 믿고 백일잔치를 하려고 모아둔 거금을 몽땅 줬다. 이튿날부터 소장은 잠수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본사에서 감사팀이 내려와 서류 일체를 압수했다. ‘공금 횡령’이라며 그를 경찰에 고발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남도 아닌, 자신을 도와주려고 온 고향과 초등학교의 후배를 이따위로 배신하다니...

누구보다 아내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충격에 빠져 한동안 홧술만 먹었다. 빚을 내 어찌어찌 아들의 백일잔치를 치렀지만 더 이상 인천에서 있을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럴 즈음 대전지사의 지사장이 대전으로 발령을 내줄 테니 오라고 했다.

미련 없이 인천을 떠났다. 소장에게 복수한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일에 더 매진했다. 이듬해 전국 최연소 사업소장으로 승진했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그러나 선배에 대한 배신감과 트라우마는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 선배를 만났다. 나를 보는 순간, 경찰을 본 범법자가 달아나듯 도망치려는 것을 쏜살같이 쫓아가서 잡았다.

“참 오랜만이군요.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인제 와서 선배님에게 돈을 달라는 소리는 안 하겠습니다. 다만 이 말 한마디만큼은 꼭 듣고 싶네요. ‘미안했다’라고 하시면 다 풀겠습니다.” 결국 그 선배는 고개를 떨구며 사과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2

믿었던 출판사였기에 두 번째 출판계약을 마쳤다. 그러나 당초 약속과 달리 출간은 자꾸만 더뎌졌다. 차일피일 미루는 출판사 사장의 행태가 못마땅했지만, 을(乙)인 내가 비위를 맞추려고 상경했다.

술을 사주며 약속 이행을 부탁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하기에 기분 좋게 내려왔다. 얼마 뒤 책이 출간되었다. 그런데 저자 몫으로 받기로 한 책, 즉 나의 저서는 계약대로의 부수에서 94권이 부족하게 내려왔다.

독촉을 했지만 마이동풍이었다. 그러면서도 “염려 말라”는 따위의 사탕발림 식 임기응변은 여전했다. 부아가 치솟았지만, 또 참았다. “출판사 사정이 그렇게 어려우시면 제가 돈을 좀 보내드리겠습니다.” 출판사 사장은 반색했다.

000만 원의 돈을 송금했다. 그게 얼추 3년이 다 되었다. 그런 데도 출판사 사장은 여전히 나머지 책을 보내지 않고 있다. 이쯤 되면 사기 아닌가?

설날을 앞두고 출판사 사장에게 전화했다. 여전히 변명으로 일관하기에 마침내 폭발하고야 말았다. “야, 이 XXX야, 네가 사람이냐?” 출판사 사장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몇 번 더 전화했지만 안 받았다.

이 세상을 65년이나 살아왔지만 송사(訟事)로 이어진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다 내가 참고 손해를 감수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만 참으려 한다. 계약은 약속이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세상엔 사기꾼이 너무 많다.

■ “서로가 약속한 일 하나의 작은 약속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수많은 말이 없어도 그 작은 행위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출처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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